요즘 이틀 정도 저녁에 일기를 적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100일 안에 이루어질 소원 적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도 멈춘 상태이죠. 그 또한 집착스러운 부분이 느껴졌고, 정말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일 반야심경을 외웁니다. 각잡고 외우는 건 아닙니다. 걸으면서, 혹은 명상을 하면서, 때때로는 그냥 자전거를 타면서. 반야심경 260자(맞는지 정확히 기억이....ㅠ.,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입니다.
관세음보살(반야심경에는 관자재보살로 표기)이 부처의 깨달음인 '반야'로 오온을 바라보니 모든 공것이 공하며, 그랬더니 결과적으로 모든 일체의 고난과 액운을 넘어가더라. 즉 초월하게 된다는 뜻이죠.
그리고 우리들이 반야심경은 몰라도 대부분 아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온'에 대해서 밝히는 부분이죠. 이 반야심경의 논리적 전개는 무척 과학적입니다. 오온이라는 전체중에 하나의 객체인 '색', 즉 물질이란 부분을 표본화 시켜서 사고 실험을 합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즉, 물질은 모두 비어 있으며, 비어있는 것이 곧 물질이다. 기원전 500년,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전 이러한 사상이 현대 양자역학의 발견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할 수 있죠. 물질을 이루는 모든 구성원은 쪼개고 쪼개다 보면 원자이며 이 세계를 '양자'라고 말합니다.
원자에는 원자 핵이 있고, 그 주변을 전자가 돌고 있습니다. 이 전자의 갯수에 따라 물질의 여러 종류들이 다른 생각을 띄게되며 그 원자의 결합이 분자단위를 만들고, 그것으로 인해 어떤 것은 수소, 어떤것은 탄소, 어떤 것을 철이 됩니다.
그리고 이 원자핵과 전자는 사실상 비어있다고 할만큼 대다수가 공간입니다. 비교하자면 축구장 가운데 작은 공이 원자이며, 그 경기장의 관중석 밖을 돌고 있는 작은 테니스공이 전자인 수준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양자의 세계로 구성된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은 '물질'로 다가옵니다. 서로 물질은 관통되지 않고, 충돌이 발생하죠. 그 비어 있는 것 사이로 서로 통과할 법 하지만, 여기에는 '약력'이라 불리우는 일종의 자기장이란 힘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우린 손을 잡아도, 손을 잡은 것이 아닙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이렇게 오늘날 인류를 지배하는 '과학'이라는 패러다임에 있어서도 충분히 증명될 수 있는 철학적, 인문학적 표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표본을 통해 세상의 진리를 알린 반야의 깨달음은 그 나머지들에 대해서 퉁쳐서 묶어 이렇게 말합니다.
'수상행식 역부여시', 즉 수상행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여기서 오온이라는 것은 붓다가 사고를 통해 가설을 세우고 증명한 세상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방식입니다. 색, 물질이 있고, 수, 그것을 느끼고, 상,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행, 그 생각으로 행동이 생기며, 식, 그로인해 안다는 것이 생긴다.
물론 이것을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한자어가 가지는 의미와 부처의 원전에서의 의미를 조합할때 가장 심플하게 해석되는 것이 위와 같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제가 반야심경을 매일 외우는 것은, 우리는 이 깨우침을 안다해도 매일 잊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간 단위로 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 만큼 이 현실 속에 돌아가는 것들이 진짜처럼 인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또한 현실입니다. 현실을 3차원 매트릭스네, 허구이네라며 유튜브에 보면 마치 그것을 정말 이해하고 정말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듯 올라오는 소위 말해 철학자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이해는 했으나, 아직 그것에 실체를 경험적으로 느껴보질 못했습니다. 아주 최근, 정말 아주 흐릿하게나마, 짧게나마 그 근처에 가 본 적은 있습니다만, 결국은 팔부능선을 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는다한들, 내가 죽어서 이 육신이 온전히 사라지기 전까진, 언제든 실체와 허상이라는 두가지 가능성을 오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 또한 저 나름의 사고실험을 거쳤으며, 그 이론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실용적이죠. 아시다시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역시 사고실험입니다. 그의 일반상대성이론은 아직 실체화된 증명이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쪽이 정확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이 시대에 고스란히 쓰입니다.
핵폭탄을 만들었으며, 네비게이션에 응용되고 있습니다.
저는 왜 이틀 동안 일기를 적지 않았을까요? 사실을 말하자면 이기적이면서 온정주의를 가진 제 마음 때문입니다. 나 혼자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고 이해하면서도 자꾸만 이 사회에 눈이 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마음공부에서 말하는 나의 생각과 업일 수도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충분히 타인의 삶을 뭉개고 저를 내세울 만큼 잘 살 수 있는 기회들은 많았습니다. 더 많은 이익을 취하고 권력자의 기분을 맞추어주고, 타인의 눈물에 무감각하며 살아갈 기회들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그렇게 살려고 노력도 했었죠.
이렇게 말하니 무척이나 깨끗한 사람같지만, 저는 제 가족들이 인정하는, 그리고 저 스스로도 인정하는 아주~ 꼬롬한 구석이 있습니다. 때로는 법을 무시하고, 내가 세운 바운드리를 넘어오면 용서라는 것이 없습니다. 때로는 괴팍하며, 내 사리사욕을 채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파고 듭니다.
그러나 딱한가지, 내가 반칙을 하다 걸렸을때, 인정한다는 점. 그 댓가를 당당히 치를 각오가 되었다는점. 그래서 가식적이든 진심이든 내가 알바는 아니지만,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존경합니다. 형식적으로나마 한번이라도 그렇게 행동하는 이들에게 진심 운운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긍정적이지 않지만 매주 나가서 그렇게 자신의 시간을 진실이든 거짓이든 알바는 아니지만, 그렇게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그들이므로, 어쩌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들보다 더 잘 사는 것이 맞을거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나라의 곳간을 빼먹고, 남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도 능력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공부하고 알아야 하는 것들이죠. 손쉽게 우리가 그들을 비난 할 수는 있겠지만, 열심히 사는 겁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될 수는 없는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 꼬롬한 인생을 살면서도 왜 그렇게 피박받은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돌아가신 분들을 향해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있긴 한건가? 왜 이 시대에 그것이 다시 등장해야만 했는가. 스스로 성찰해봅니다. 타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나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다만, 그게 무엇이든 언젠가 죽는 다는 사실만 선명할 뿐.
이성적 사고에서 트럼프라는 정치인은 보여지는 면에서 '정의'와는 동떨어져보입니다. 그러나 알고보면 그는 무척이나 영악한 구석이 있으며, 예상외로 정의로운 부분도 많습니다.
정의를 주창하며 권력을 얻은 우리나라에 대통령은 그의 말과 달과 정의롭지도 않았으며 무능이라는 단어에 포장된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악이라는 평가를 얻을 만큼 사악합니다.
저는 마음 공부를 한다는 사람들, 마음공부와 관련된 카페에서 2번이나 쫓겨났습니다. 어떤 방법은 되고, 어떤 방법은 되지 않고, 자신의 방법이 맞으며, 그것과는 반대되는 의견이 오히려 도반들의 혼선만 가한다는 것이 이유였으며, 때로는 그들이 형성하려는 어떤 선을 넘어서였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런 아쉬움도 이젠 없습니다. 내가 맞은지, 틀린지에 대한 논쟁에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나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카페에 글을 적어서 소위 말해 '트래픽'을 올려줄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나의 블로그를 만들어서 그곳에 내 생각과 경험 철학을 적자.
그리고 그것이 한번의 견성이나 깨달음으로 마치 자신이 스승이나 되듯 타인에게 쉽게 조언하고, 방법론에 있어서 한계를 만들지 말자.
마음공부에는 몇가지 정론같은 가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이들이라 말하는 이들 역시 체험적으로 경험했다는 그 환상적인 것이 있습니다.
1. 우리는 모두 하나다
2. 이 세상은 100% 나의 책임이다.
3. 생각은 세상을 창조한다.
이 3가지 가설에 대한 저는 저 나름의 사고적, 과학적 증거가 있기에 가설이지만, 정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의 경우는 아직 온전히 내 온몸으로 체험치 못했으며, 3에 관해서는 절반은 증명가능하며, 그 절반은 아직 실험중입니다. 그러나 90%는 체험한 부분이죠.
그런데 깨달은 이들이 왜 저 3가지에 대해서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말을 할까. 그저 믿으라는 식으로 말하고 양자역과과 관련해서 겉핡기 정도의 공개된 이론으로 스스로의 가설에 증명이랍시고 내새울까? (저는 개인적으로 토목공학도로써 양자역학의 공식과 반도체의 작동원리까지 공부하려 했습니다만..... 능력이 딸려서 포기했습니다)
언행불일치, 뭐 그건 이해합니다. 인간이니까. 인간이란 그런 존재니까. 자기가 마치 깨달아서 신선같은 느낌, 선생님 같은 느낌이겠지만, 그 역시도 결국 인간이니까.
그런데 그들이 내세우는 최소한 관념적 이론은 논리적이어야하며 앞 뒤에 모순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경전으로 정리된 것 뿐만아니라 평소에 그들이 행하는 행동이나, 그들이 내뱆는 말들에도 스며들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들으면 불쾌할 수 있지만, 마음 공부하는 이들 속에서 참으로 이기적인 이들을 많이 봅니다.
마치 교회를 다니는 이들이 사랑보다 이익에 취하여 점점 교세가 축소되는 것처럼, 부처가 스스로 부처임을 깨달으라고 했으나 부처상을 만들어 기복을 비는 보살님들처럼, 혹은 비우고 집착하지 말라는 말을 따르는 이들이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서 사랑과 자비를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들을 비난 할 자격은 대중들에게도 없습니다. 외제차를 타고 오는 이들과 경차를 타는 이들을 그는 단순히 차로써 평가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어쩌면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그런 '위력'과 '상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아무 의미없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세상은 그렇게 돌아갑니다. 조금은 나아지고, 조금은 후퇴하면서.
다시 뉴스를 끊어야 하나 싶다가도, 이 세상에 나는 책임이 잆는 것인가? 침묵해야 하는 것인가? 오롯히 나와 내 가족정도만 잘 살 수 있는 길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나를 위한것인가? 그것이 나의 미래가 되는 내 아이들에게 책임있는 삶을 알려주는 것일까?
반야심경에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 몽상 구경열반' 이란 말이 있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으며 마음에 걸림이 없으니 두려움도 없고 진실(원리)이 뒤집어 져서 꿈꾸지도 않고 열반을 보게 된다.
그래서 항상 저는 저의 마음에 걸림이 있는지 없는지를 관찰합니다. 이틀 동안, 그 걸림이 많아, 제가 계획한 일들보다 오히려 다른 것에 시간을 쏟았습니다. 이 글 역시 그 걸림을 풀어내기 위한 글입니다.
마음공부하시는 여러분, 스스로 이기적이진 않은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모순적이진 않은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당신의 이웃, 당신의 세상은 아무래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100% 내 책임이란 말을 받들고 있진 않는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래전 돌아가신 부처대신 목불을 향해 기도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 대신 이웃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살면 잘 사는 삶이라는 결국 '세상이 던져준 타자의 삶'을 살고 계신것은 아닌지.
끌어당김의 경험에 대한 진면목이 아닌 비법과 방편에 몰두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그냥 생각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로써 저는 이 세상을 향해 내가 할 도리를 한 듯합니다.
이제 제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오늘 하루 축복된 삶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9oC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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