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명상을 하며, '나는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잡고 진행하던 도중, 문득 내 안에 있는 수 많은 잠재의식 속에 들어 있는 아픔이나 상처등에 대한 무의식 속 감정들에 대해서 소환을 허락해 보았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 기억들, 상처, 그리고 청소년기, 성인까지 몇가지 고정된 이벤트들이 떠오릅니다. 나름 과거에도 그것들에 대해 감정을 흘려보냈으나 다시 그 장면, 사람들, 그 시절의 나. 이전보다 더 선명하게 인식되는 상황들. 그 중 어떤 이에 대해서는 뺨을 한대 후려갈기기도 하고, 그 초라한 모습이 갑자기 확늙어버리는 모습 속에 연민도 느껴졌습니다.
그래 당신도 살아야 했겠지, 당신도 미숙했겠지, 아마 지금 내가 그 시절 당신보다 더 나이가 낳을텐데, 알것 같아. 살아 남는 다는게 어떤 건지. 용서해. 아니. 이해해. 당신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는 걸.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어린 시절의 나를 안아주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거 알지? 넌 나니까, 알거야.이런거 크게 의미도 없고, 시간이 지나면 다 없던 일이야. 지금에서, 그러나 내 몸 어딘가에서 남아있는 널 안아줄게.
이런식으로 몇가지 기억들을 떠올리며, 그 감정을 오롯히 느끼고 수용한 뒤에 흘려보내기를 했습니다. 가슴 쪽에서 엉어리 진 느낌이 남아 있으면, 그것이 서서히 사라질때까지 계속, 완전히 없애지 못해도 또 머리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기억을 따라서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기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참 자아에겐 어차피 허상같은 한 순간의 꿈이기에, 그럼에도 여기 있는 나라는 자아의 뇌와 온 몸 속에 세겨진 기억들, 그러는 사이 아주 어렴풋이 내 자신이 나라는 개체에 머무는 것이 아닌 전체 의식에 희미한 접속이 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온전하진 않지만, 마치 TV속에 잘 잡히지 않는 수신상태처럼 지직거리면서도 미묘하게 느껴지는 전체의식, 그러나 집중하는 것으로 해결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은 이미 계획되었던 것이겠죠? 그 속에서 배우고 경험하는 것이니까.
한 6개월을 뉴스도 안보고 정치 사회에서 관심을 끊었다가, 요즘 그것이 다시 눈에 들어옵니다. 무슨 상관인가 하다가도 결국 개인 하나하나가 어울리는 것이 사회며, 그 속에는 정치 구조가 있죠. 지금은 민주국가이니까요. 그러나 누가 스스로 주인이라고 생각할까요?
이태원 참사를 겪은 부모님 두분의 인터뷰 영상을 보노라니, 이 사회의 작은 구성원 하나하나가 만들어낸 세상을 봅니다. 얼마전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에 대한 당시 시대적 해석을 보고, 새로운 관점을 하나 배웠습니다. 용서라는 것은 그 당시 예수들이 주로 어울린 하층민들에게 허락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교 경전 중, 붓다의 실제적인 이야기에 가까운 니까야 경전 속에도 '비인(非人)'이란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처음에는 이들이 사람이 아닌 귀신이나 초월적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읽다보니 그들이 바로 카스트에도 들어갈 수 없는 '불가촉 천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의 이웃을 나와 같이 대하라. 오른쪽 뺨을 맞거든 왼쪽뺨을 내어주라. - 교수님 말씀 왈 오른쪽 뺨을 맞는 다는 것은 상대방이 손 등으로 뺨을 때리는 것입니다. 즉, 상당히 모멸감 있는 행동이죠.
즉 예수가 주로 만난 하층민들은 지배자의 그런 모욕적인 행동에 물러나야 했던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때 자신의 왼쪽뺨을 내어보이며, 나도 너와 같은 인간이다.라는 저항의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 바로 그 진정한 의미라는 것.
용서 역시 지배자의 미덕이지, 하층민이 감히 누구를 용서한단 말입니까. 그 말은 결국 노예의 근성에서 벗어나, 주체적 삶을 살라는 말.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는 기분이었습니다. 20세기 근대 철학의 중요한 인물 니체 역시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이라는 개념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접근을 했었습니다.
주인의 도덕에서 선은 고상함이며 악은 저속함입니다. 노예의 도덕에서 선은 양보와 겸손, 자비와 인내이며, 악은 착취와 과시, 억압과 독단이죠. 그리고 그 안에서 분노가 자라게 됩니다.니체는 그것을 '르상티망'이라고 명명했죠.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에서 주인의 도덕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지만, 여전히 인터넷 어딘가에서는 자식의 죽음으로 시체 장사를 한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식은 가져봤을까요? 저는 자식을 죽이거나 버리는 부모를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로써는 그 유전적으로 저를 지배하는 DNA의 힘을 거역하지 못하거든요. 이성적으로는 저 역시 저에게 잘하는 자식을 원하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어이 없을 만큼 자신들이 누리는 것이 당연하듯 받아들이죠.
그러나 전 그런 그들을 사랑합니다. DNA가 저를 그렇게 시키니까요. 대단한 사람들이죠. 그걸 이겨내는 결정을 한다는 것은 결코 비아냥이 아닌... 정말 대단한 겁니다.
그게 인간과 동물의 차이입니다. 유전자가 부여한 패턴을 벗어나는 행위를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사피엔스가 그 수많은 인류의 다양한 종을 멸종시키고,, 오직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게 된 힘이죠.
저에게 용서란, 용서받을 자격에게 주어지는 용서. 스스로 잘못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는 사람.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어떤 벌이라도 합당하게 받겠다는 자세의 사람. 그들에게는 용서라는 환상을 경험할 수 있지만
용서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거짓눈물과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들을 향한 용서는 결국 또다른 피해자를 만들고,, 그 피아에게도 역시 같은 잘못을 하게 만드는 일일 겁니다 '교훈'을 주지 못한 것이죠.
어떤 이는 그런 것조차 하지 않고 뻔뻔하게 목소리를 키웁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더 이상 죄짓지 않을 기회를 주는 것도 용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면, 홀로 살게 한다던지, 아니면 이번 삶을 끝내주게 하는 것도 어쩌면 그 사람의 영혼에 있어서 진정한 용서일 겁니다.
우리 국민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이런 이야기를 디지털 노마드를 하는 사람은 해서는 안된다고 배웠고, 맞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말에는 상대를 사람이 아닌 상품으로 보라는 막시즘적 사고,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실존적 사회에 대한 경고이며 현명한 대응일겁니다.
그러나 제 영혼은, 조금이라도 다함께 사는 사회에 앞장서지는 못해도 침묵하며 동조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게 제 양심이며 정체성이네요. 그게 제가 용서하는 방식이며 제 삶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그 무자비한 이들도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안아주는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쉽진 않았지만요. 결국 그들도 용서 받을 것입니다. 그 용서란 책임을 회피하는 용서가 아닌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책임질 줄 알게 하는 주체적 용서일 것입니다.
대중은 바보같습니다. 그러나 집단 지성에 대해 저는 믿습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그렇게 발전해 왔으니까요.
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까요? 모릅니다. 2차대전이 터지기 직전, 대공황이 일어나기 직전의 하루가 오늘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린 어떡해야 할까요? 그냥 오늘 하루 열심히 살면 되는 겁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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