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마음공부

9oC의 마음 중계 2409. 수행하는 삶? 깨달음? 그게 뭔데?

리뷰파파 리파 2024. 9. 30. 17:45

안녕하세요. 리뷰파파 리파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9oC라는 이름으로 제목을 달아봅니다. 다른 곳에서는 '구오씨'라는 닉네임을 쓰기도 합니다. 안물안궁(안 물어보고 안 궁금하다)이란 말처럼 요즘은 상대방의 닉네임에 대해 크게 묻지 않습니다. 익명성이 강해져서 일까요?

 

컴퓨터 통신, 그러니까 하이텔,천리안,나우누리와 같은 서비스를 아신다면 그래도 연령대가 조금 있으실거라 생각됩니다. 여기서도 좀 나뉘죠. 전화 모뎀 시대와 초고속 인터넷 시대로. 그 시절에는 컴퓨터 통신 속에서의 만남에 '낭만'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항상 상대방의 닉네임이나 ID에 대해 물으며 이야기를 시작했었죠.

 

구글에서 하이텔 검색했을 때 화면 캡쳐

 

20세기에는 의미를 담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21세기는 닉네임으로 웃기는 시대가 되었죠. '상상 플러스'라는 KBS 예능프로에서는 시청자들의 이야기를 읽어주는데 정말 그 상황에 맞는 기발한 닉네임과 글로 큰 웃음을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 여기서도 어쩌면 '노현정' 아나운서와 탁재훈씨가 활약하던 시절만 떠올리는 분들이 있으시겠네요. (찾아보니 2004년부터 2010년까지 방영했네요. 대단!)

 

9oC는 9 off Center Line의 약어입니다. 중심에서 9 정도 떨어졌다는 도면의 표기법 중에 하나입니다. 한마디로 '아싸' 즉, 아웃사이더 기질의 제 성향을 표현한 것입니다. '안물안궁'이시라구요? ㅎㅎ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1. 마음 공부라는 새로운 장르

언제부터 이런 단어가 생긴거죠? 분명한 것은 21세기, 아마도 '시크릿'이라는 베스트셀러 책(혹은 비디오)이 유행하던 시절.. 그 이후 어디쯤이 아닐까 합니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마음'이란 단어와 '공부'라는 단어가 합쳐진 것 뿐인데 이건, 여전히 여전히 요즘에도 유행하는 하나의 장르이죠. 저 역시 그 카테고리 하나에 편승하고 있는거겠죠?

구글에서 시크릿 검색시 출력 호면 캠처

이 글을 처음 생각했을 때는 의도한 것도 아닌데 상상플러스가 방영하던 시기가, 제가 '시크릿'이란 책을 알게 된 2007년 즈음이고, 방영이 끝나던 2010년 1월이 아마 제가 사회생활이 힘들다 싶을 만큼 마음이 고장나던 시기입니다. 재밌네요. 그 프로를 보며 웃었던 기억뿐인데, 그 시간 어디에 힘들었던 시간이 공존했다는 사실이.

 

그냥 공부도 힘들었는데, 이제 마음도 공부해야 하는 세상이 올 만큼, 그런 단어가 만들어지고 유행할 만큼, 오늘 날 우리에게 결여된 마음은 무엇일까요? 마음의 결여인가요? 아니면 물질의 결여인가요? 둘 다 인가요? A.I의 무서운 성장을 보노라면 저는 왠지 '이것' 만큼은 아무리 컴퓨터가 발달해도 인간을 넘지 못할 거라던 믿음의 처절한 파괴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마음'도 포함되지 않을까요? (생각 남겨주세요 ^-^)

 

A.I가 한계라고 생각되던 바둑의 벽을 넘었던 순간 (출처 : KBS 뉴스)

 

2016년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에서 다수는 인간의 승리를 점쳤습니다. 서양의 체스조차 인간의 벽을 넘지 못했던 컴퓨터가 인간을 이기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죠. 바둑은 체스보다 더 복잡한 알고니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인공지능의 승리였죠

 

거기서 더 놀라웠던 것은 기존의 문법을 깨고 괴상한 플레이를 보여주었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승리를 이끌었다는 점이었죠. 기존의 A.I라는 것은 인간의 프로그램에 의핸 여러 가정들을 알고니즘화 한 것이었다면 알파고는 스스로 학습하는 방법으로 수많은 실패와 수정을 통해, 스스로 프로그램화 했던 것이 특징이었죠.

 

이제 우리는 정말 터미네이터와 같은 A.I가 인간에 대해 어떤 식으로 다가올지를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시대까지 와 있습니다. 여기에 역설적인 희망이 하나 있다면, 완벽을 향해 가는 컴퓨터와 달리 인간은 불안정한 면을 가졌다는 것이죠. 그 예측 불가능하고 비합리적인 면이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강점으로 주목 받습니다.

 

2. 치료에서 수행으로

저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잠시 고민 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 공부'라는 말보다 그저 편하게 TV를 보듯, 마음을 중계해 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저 역시 제 마음의 변화를 이해하고,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도 한 인간의 변화되는 과정, 그리고 성장 속에서 얻어가시는 것들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죠.

 

앞서 저는 꽤 오래전 마음의 고장을 경험했습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흔히 말하는 스트레스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 증상의 이름도 몰랐고, 또 살아가면서 흔히 겪는 부대낌이 좀 심하다 싶은 정도였죠. 많은 일들이 있었고, 결국 사회생활 자체를 하기 힘든 단계까지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나았습니다. 그 안에는 저 나름의 노력들이 있었고, 여러가지 운들도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한 치유라고 말할 만큼 의욕적이었고, 여러 부분에서 그 증거가 될 만한 모습을 사회 생활도 잘 하게 되었고, 마침 새로운 기회들도 찾아오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가끔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에는 흔히 말해 '울증'과 같은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괴롭다라는 생각보다 또 내 몸이 뭔가 불안함을 느낀다는 감지 같은 것을 하게 되었죠. 그러면 충분히 그것을 스스로 해결할 노하우들이 있었기에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출처 : http://webzine.newbuddha.org/article/187

 

그리고 제가 최근 알아차린 것은, 여지껏 내가 '마음 공부'라고 일컬어지는 일들을 치료의 관점에서 접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말도, 수행이란 말도 제게는 무척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은 '스님'같은 분들이나 하시는 일이지 저와 상관 있는 일들은 아니었죠. 그런데 이 단어들이 요즘 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마음이 다시 문제를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3. 그 일에는 모두 의미가 있다.

정말 올해는 '왜 이런 일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저에겐 많은 일들이 생겼습니다. 비단 심리적인 것에 국한 되지 않고 현실적으로도 생각지도 못한 상황들, 물건의 고장등을 경험했죠. 엉망진창라고 말 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운'은 반대로 힘을 쓴 것 처럼 보였죠.

 

극심한 자살 충동을 느꼈습니다. 과거에 행했던 나의 노하우들은 이번에 생긴 마음의 요동을 전혀 잠재우지 못했습니다. 갈수록 시선은 좁아져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라는 사람의 존재 이유도, 가능성, 능력... 모든 것이 의심을 넘어 '넌 안되나 보다' 라는 확신으로 옮겨 갔죠.

 

그러나 지금은 그 일들 모두에 이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는 확신이 들고 있습니다. 문득 길을 걷다보면 짧게 스치는 희망적인 메세지들이 있습니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들이죠.

 

불과 몇달전에는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언젠가 제가 여러분에게 그 자세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겠지만, 지금은 그 과정은 넘어가겠습니다. 그냥, 조급해지는 마음을 잊도록 책을 읽고,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동안 자신을 돌아보는 침묵을 가졌다는 것 정도가 답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수행이란 삶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깨달음, 제가 성취할지는 모르지만 그저 수행 속에서 눈 뜰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4. 인간 붓다는 어떠했을까?

 

온화한 얼굴의 부처 상(출처 : 불교신문)

 

저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교리 공부도 받았고 그를 통해 정말 많은 배움과 경험을 체험 했습니다. 정확히는 지금도 저는 천주고 신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구절을 읽거나 기도를 하기보다.. 오히려 불교 경전의 '반야심경'을 암송고 심지어 어떻게 고타마 시타릇타가 깨달음을 얻은 그 실제 과정을 더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어렴풋 듣게 된 지식과 그렇게 알게된 불교의 몇가지 경전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어려웠습니다. 대략적인 감이 오기도 했지만, 모르는 의미, 한자, 빨리어, 산스크리트어 등, 불교라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면이 있다는 것을 정말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강성용 교수' 님의 강의 속에서 불교의 '율장'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그 율장의 일부를 정리한 책을 1독하고, 천천히 2독을 하며 정리를 해 나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합당한 이유들을 발견합니다. 종교라는 다소 비논리적이적이 주장을 '믿음'이라는 단어로 무마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하나의 지켜야 할 것들에 적절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재미가 솔솔 합니다.

 

모르지만, 제가 출가를 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잘 사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여전히 생각하고 있습니다.웃을 일이 없었는데 요즘 가끔이라도 웃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좋네요. 이런 변화.

 

5. 어쩌다 마주친 '책' 한 권

가끔 날씨가 더워 도서관 열람실이 아닌 자료실에 가서 시원한 에어콘 바람으로 땀을 식히고 있습니다. 뭐 멍하니 있긴 그렇죠? 해서 신간 코너에 꽂힌 책들을 스~윽 보곤 합니다. 표지도 보고, 요즘은 어떤 주제로 채들이 나오는지 등등. 가끔은 그 자리에서 스~윽 한 번 훑어보기 하죠.

 

그러데 아주 심플하며, 두께도 얇은 책한 권을 보게 돕니다. 사실 제목조차 오해하고 집어들었습니다. 괴상하다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내용은 그냥 가게 창업에 관련된 이야기였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책 제목을 잘못 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제 작업모습

 

책을 후루룩 펼쳐보다 우연히 한 대목에 눈이 갔습니다. 그리고 읽었는데.. 뭔가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냥 시간이나 때우자고 집어든 책을 읽다보니,  내용이 좋아 대출을 결심했습니다. 아직 이런 식으로 책을 선택한 적은 없었습니다. 저는 이 역시도 '인연'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낡은 노트북, 운영체제도 윈도우 7입니다. 하지만 조금 불편해도 충분히 글을 적고, 정리하는 정도는 충분합니다. 친구이자 후배가 수 년전에 저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그 친구 역시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은 미루고 미루다가 최근에서야 뭔가 결단이 필요한 단계까지 다가왔죠.

 

책을 집으며 그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내가 먼저 읽고 정리해줘야 겠다고 생각했죠.

 

6. 깨달으면 그걸로 뭘 할 수 있는데요?

저는 근래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몇 분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중에는 한 분은 직접 만나 이야기도 듣고 질문도 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죠. 제가 한 질문 중에 하나는 "깨달음을 얻어서 뭐에 쓰는 건데요? 깨달으면 그걸로 뭘 할 수 있는데요?"

 

서양의 '욕' 중에 하나가 가운데 손가락만 치켜 올리며 fuck you 라고 말하는 것이죠. 더 정확히는 그 행동만으로 충분히 모욕을 표현 가능하죠. 뭐 어릴때 부터 외국 영화에서 워낙 많이 보던 것이라 익숙한 동작이고, 우리 나라 사람들도 그 영향으로 자주 쓰죠. 단지, 저는 그게 왜 욕인지 성인이 되고도 한참 뒤에야 알았습니다.

 

어떤 계기도 없이, 누가 알려주지 않았는데.. 문득 그것이 남자의 성기를 표현한 것이구나.. 라고 깨달은 것이죠. 맞아요!. 저도 깨달았어요. 그런데, 세상과 삶에 대한 깨달음은 뭘까?, 뭐가 달라지는 게 있나? 지금.. 욕에 대한 깨달음이 뭘 바꾼게 전혀 없는데.. 이건 뭐가 다른가?

그리 시원한 답을 얻진 못했습니다. 깨달음, 수행 이런 단어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같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단어가 아니라고 생각이 들지 않나요?. 최소한 저는 그랬습니다. 그 오래전 시크릿과 같은 책들을 여러 권 읽었지만 그것을 마음공부라고 생각하며 읽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때는 그런 말도 들어보지 못했고, 마음이란 것이 특별히 공부를 해야 하는 거라고도 여겨지지 않았니다. 그러던 언제부턴가 마음 공부라는 단어를 듣게 된 것 같아요. 어쩌면 종교가 '신'의 이름을 벗고 조금 더 대중에게 다가온 것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의식하며 했던 것은 아니지만 저는 오랫동안 깨달음을 위한 마음공부와 수행을 했던 것이죠. 행위적으로는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있어 그런류의 책을 읽고, 명상을 하는 것들은 '치료' 였습니다.

출처 : pixels

그리고 이젠, 수행을 해보자.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 체험해보자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크게 행위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큰 변화이기도 합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제 나름 얻은 답은 현재가지 이렇습니다.

 

깨달음을 얻는 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본다'이며, 그 목적은 더 잘 살기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고타마 싯타르타가 세존 붓다가 되어 살아간 삶을 쫓다보면 좀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율장을 읽고, 다시 정리를 하며 꼼꼼하게 보는 중입니다. 

 

그 과정에서 번잡하던 마음이 많이 고요해졌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전혀 웃을 상황이 아닌데, 자주 웃게 되었습니다. 행복이란 어떤 조건이 성립해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느낀다는 것도 이해하고, 실제 체험중입니다.

 

앞으로도 제가 수행하며 체험한 위주의 글을 정기적으로 올릴 생각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