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이 반이다. 이제 딱 절반이고, 또 후반의 시작
자, 지난 시간까지 반야심경의 전반부를 보았습니다. 부처의 깨달음을 통해 세상을 보니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 그리고 부처가 가르쳤던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가르쳤던 것도 모두 잊으라는 것이죠. 이제 전반부의 마지막 구절을 시작할 겁니다. 제가 굳이 이 지점을 앞서 '무OOO' 식의 음률과 결을 같이해서이기도 하고, 이곳에서 '부처의 가르침'이 하나 더 나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면 중반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이런 해석은 오직 제가 반야심경을 외우면서 나름의 방법으로 구분한 것이니, 자유롭게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그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무지 역무득(無智亦無得)
*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보리살타(菩提薩埵) 의 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蜜多)
먼저 첫 번째 문장부터 뜻을 전합니다. "고집멸도도 없고 / 아는 것도(지혜) 없으며 / 얻는 것 또한 없다" - 자 여기까지가 저는 사실상의 전반부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를 죽여라'라는 화두처럼 부처의 가르침 자체를 잊으란 것이죠. 그러나 문장의 맥락이나 암기를 하는 리듬상 '이무소득고~'로 시작하는 문장을 같은 문단으로 하는 게 훨씬 매끄럽습니다.
두 번째 문장을 해석하면 "이와 같이 얻는 것이 없으니 / 보살이 / 반야바리밀(부처의 깨달음)에 의지하니" - 뭔가 마무리가 되지 않고 계속 이어져야 하는 느낌이죠?. 이게 고집멸도 때문인데 이 부분을 사실상 이전 문단으로 들어가야 맞습니다만. 앞서 A부터 B 까지라는 형식으로 6경과 12연기를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같은 구조로 가지고 있다 보니 따로 빼야 하는데, 또 그러기엔 운율이 좀 안 맞죠. 또한 '무지 역무득'이란 것은 부처님이 가르쳐준 지혜로 앞서 나온 모든 것을 통칭하기도 하죠.
자 여기서 '고집멸도'라는 게 나옵니다. 이 단어 역시 너무나 익숙하며 학교에서도 배웠을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앞서 산다는 것이 모두 고통이다'라는 의미로 '일체개고'라는 용어가 나왔죠. 부처는 여기서 그 고통이 사라지는 핵심적인 위대한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4성제'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것이 바로 '고집멸도'입니다.
12연기에 나왔던 단어들이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고통이 발생하는 순서 또는 PROCESS였죠. '고집멸도' 역시 이런 순서입니다. 이것도 원래는 고제,집제... 이런 식으로 뒤에 '제'자를 붙이는 게 맞습니다. 그럼 해석해 보겠습니다. " 苦(고) - 고통이 생기면 集(집) - 집착이 일어나고 滅(멸) 이것을 멸하려면 - 道(도) 도를 닦아야 한다."
자 여기서 '고'라는 글자를 단순히 고통, 괴로움만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감각'이라고 보는 게 저는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좋다, 즐겁다는 것도 해당되는 것이죠. 즉 일체의 모든 감각들이죠. '집'은 그 감각에 대해 12연기에서 설명한 것처럼 '무명~수(느낌)'까지가 '고'라면 '애-취' 감정이 생기고, 욕망이 생겨 집착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혹은 그 이후로 연기법에서 설명하는 유-생-노사까지도 포함되겠죠. '멸'은 죽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12 연기의 맨 마지막이 死(사)로 끝나죠. '멸'은 이 12연기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것. '업보'를 끝낸다, '카르마를 없앤다' 그런 뜻입니다.
불교는 윤회, 즉 전생이 있고, 현생은 그 전생의 업보를 가지고 태어나 그 댓가를 치르는 것이죠. 살아생전 업보를 쌓지 말아야 하고, 이 모든 업보를 다 없애면 더 이상 윤회의 사슬을 끊고 부처가 되어 극락에 이른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은 불교의 지식보다는 '기독교'와 관련된 지식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건 지극히 제가 살아오면서 만난 이들을 통해 느끼는 점입니다.) 지옥이란 개념은 기독교나 불교 모두 같은데 '극락'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보통 기독교는 하느님 나라라고 표현을 하고, 영적인 용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물리적인 어느 공간 같은 느낌이 들죠. '극락'이란 단어 역시 저도 그렇게 이해를 하였으나, 반야심경을 통해 불교에 대해서 좀 자세히 들여다보니 개인 스스로에게 찾아오는 개념적인 '극락'에 대한 '체험'으로 이해가 됩니다. 이 가상의 현실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고 온전한 상태가 된다는 것 정도로 저는 이해를 했습니다.
2.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제 전반부가 끝났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해석이 좀 애매하게 끝났죠? 그래서 사실은 전반부가 끝남과 동시에 후반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해석을 다시 이어가면서 다음 문장을 적어보겠습니다.
얻는 게 없으니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부처의 깨달음)에 의지하니
고심무가애(故心無罣礙) 무가애고(無罣礙故) 무유공포(無有恐怖)
원리전도몽상(遠離顛倒夢想) 구경열반(究竟涅槃)
삼세제불(三世諸佛) 의 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蜜多)
고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또 앞에 문단들처럼 '무OO' 형식이 나오죠. 하지만 여기서는 불교 용어와 상관없습니다. 다만 故(옛 고)라는 한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보다는 '그러하므로'의 뜻인 '고로'라고 해석이 된다는 정도만 알고 가시면 되겠습니다. 앞에 붙으면 '고로'이고 뒤에 붙으면 '그러하므로'로 해석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 끊어 적은 순서대로 해석을 해보겠습니다.
고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 걸림이 없으므로 / 두려움이 없다
멀리 떠난다. 뒤바뀐 헛된 생각을 / 최상의 열반에 이른다
삼세제불(과거, 미래, 현재의 부처)이 / 의지한다 / 반야바라밀다에
고로 얻게 된다 /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자, 이제 2가지 용어만 알면 되겠네요. 삼세제불은 설명에도 적었듯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입니다. 앞서 미륵 이야기도 나왔었는데 그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제가 처음에 불교는 힌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절에 가면 석가모니 부처상 외에도 수많은 부처들을 보게 됩니다. 일단 부처는 '절대신'이 개념이 아니며 여러 명이 존재합니다. 삼세제불은 그냥 그 정도로만 저도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나왔습니다. 제가 반야심경을 접하면서 가장 괴상한 말이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를 음역 한 것인데 한문학적으로 접근을 하다 보니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더란 겁니다. 특히 '뇩', '먁'.. 무슨 이런 괴상한 발음이 나는 한자도 있나 싶더군요. 마지막에 '보리' 이건 좀 익숙하시잖아요? 바로 보살님의 그 '보리살타' 즉 '깨달음'입니다. 그럼 '아뇩다라삼먁삼'만 알면 되겠네요. 아뇩다라는 '위 없는', 삼먁삼은 '비교할 것 없이 바른'이란 뜻입니다. 즉 ' 이보다 높은 것도 없고, 비교할 것조차 없이 바른 깨달음'이란 뜻입니다. 한마디로 절대적인 깨달음입니다.
반야심경을 알고 암송을 한 것이 벌써 몇 년이 지나면서도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냥 암송하기 위해 번역을 보며, 아는 한자와 버무리여서 외운 것이죠. 어쩌다가 다른 불경에도 관심을 가져 해설문을 보다 보니 알게 된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결국은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뉘앙스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반야(깨달음) 바라밀다(완성한)는 우리가 갈고닦아 도달한 것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결승지점 정도가 되겠죠.
보살은 아직 부처가 아닙니다. 결승점을 아직 통과한 것은 아니죠. 여기서 그럼 '관세음보살'은 뭔가 싶으실 겁니다. 이 분은 말하자면 부처가 될 수가 있는데 그것을 거부하시고 모든 중생들을 구하고자 '신'이 아닌 '중생'에 머무른 존재라고 설명이 됩니다. 그러나 일반 중생과는 레벨이 다르겠죠?
문장을 처음부터 다시 해석하면 이러합니다.
" 고집멸도도 없고, 아는 것도, 얻는 것 또한 없다. 이와 같이 얻는 것이 없으니, 보살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니~, 마음에 걸리는 게 없고, 걸림이 없으니 두려움이 없다. 삼세제불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니 최상의 비교불가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3. 그러니 두려움 없이 행하라
오온개공이 관념철학이라면 바로 이 구절이 행동철학이라고 저는 생각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항상 두려움 앞에서 움찔움찔합니다. 걱정을 하고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하죠. 때로는 외부적인 영향으로 인해 고통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다 허상이다. "가상세계야, 안 죽어. 그냥 앞으로 가!"
저는 여러분들이 이 부분을 한 번 더 곱씹어보시길 희망하며, 오늘은 여기까지 적겠습니다. 아마도 다음이 반야심경의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이 글은 반야심경에 대한 여러 글들과 해석들을 토대로 제가 느낀 생각을 버물여 적었습니다.
긴 글을 읽어주신 것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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