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처음 읽으신다면 Part.1부터 차례대로 읽으시길 권합니다. 별도로 읽으시면 이해에 어려움이 있으실 수 있으므로 재미를 보장드리기 어려운 바입니다.
9. 신은 언제나 나를 먹이신다.
종교는 뭘까요? 제가 교육을 받을 당시 교리에 정해진 것을 절대적을 믿는 것이 신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합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면 항상 의심을 하였기에 속함 속에서도 배제되어 있는 기분을 항상 느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절차라기보다 신념
저는 신의 목소리로 제 마음속에 울리는 어떤 메시지를 들었고, 실제로 그 힘을 통해 제 자신은 지옥처럼 느껴지던 어떤 현실을 차츰 회복하여, 오히려 나에게 아픔을 준 자를 이해하고 걱정하는 경험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이라 칭하고 예수라 칭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저 하나의 문화이며 인간이 만들어 낸 개념에 불과하죠. 오늘날 말'을 소'라고 부른다고 해서 실체가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단어가 함축하는 의미는 오랜 교육과 약속에 의해 정해진 것일 뿐이죠.
정말 지난 10년 이상의 시간은 제 삶을 단순하게 만들지 않는 격동적인 기적도 절망도 체험하게 했습니다. 그 일 하나 만으로도 저는 책 한 권을 쓸만한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죠. 그건 결코 관념적인 것이 아닌 온전히 제 스스로가 겪어낸 체험입니다.
그런 격동 속에서도 신은 저에게 먹을거리를 주었습니다. 타인에게 손을 벌리지 않게 적당히, 때로는 풍족하게 주셨습니다. 부족한 것은 없었습니다. 저 자신은 낭비를 싫어합니다. 필요한 것에는 과감히 쓸지라도 허비되는 것에는 철저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행히 이 부분은 제가 함께 살고 있는 이들에게도 그 경중은 다르지만 같이 하는 부분이 있죠.
그런데 새컨드 임팩트에서 저는 그 믿음마저 무너지려는 아찔함을 느꼈습니다. 제 자신이 대체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과거의 어떤 트라우마일까? 숨 많은 스토리가 있지만, 전 대부분을 이해하고 부분적으로는 용서하고, 그저 무감각해져 있었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헤집어도 그다지 상처될만한 것들이 없었습니다. 각자 그럴만한 이야기가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잘 꾸지 않은 꿈들을 꾸었죠. 하루는 싸늘하게 죽음이 되신 어머니를 껴안고 울던 꾸었고, 그 죽음에서 전해지는 싸늘 함을 겪어보신다면, 감히 얼음 이상의 차가움을 경험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신이 차려준 밥상을 젝 차려고 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의 저로써는 그 멍청한 망상들에 웃음이 나지만, 당시에는 그게 저에게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믿음을 말씀드립니다.
10. 어떤 선택이 무엇이든, 그 당시 당신에게 있어 그것은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더 나은 만남, 기회. 우리가 과거를 복기하면 수없이 많은 선택지를 가지고 있고, 그건 정말이지 다른 결과들을 만들어 내었을 겁니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건 그저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믿으세요. 당신에 그 시절 주어진 선택의 범위는 좁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건 가장 탁월했습니다. 어찌 되었건 우린 지금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2가지의 믿음이 형성되었습니다. 자칫 흔들릴 수도 있었으나, 여전히 이 2가지 믿음은 절대적이며, 어떤 경로로 다가올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좋다고 믿었던 일이 불행으로 다가올 수도, 그 반대일 수도 있음을 수없이 경험하셨을 겁니다. '전화위복', '새옹지마'라는 사자성어에서 우린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았죠. 지금의 우리는 그렇게 가장 최선의 선택으로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11. 처음으로 돌아가
오래전 책들을 꺼내어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한번 읽으며, 당시에 이해하지 못한 것, 보지 못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죠. 무엇보다 책을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렸습니다. 그저 한번 쭈욱 읽고, 필요한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또 책으로 읽고, 정리된 것을 읽으며 7독을 목표로 하게 되었죠.
이미 보았던 저에게 고전 같은 책들을 다시 꺼내 읽으며 더 많은 이해들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오래전 책들과 새로운 책들을 조금씩 읽어나가기 시작하면서 제 마음에는 새로운 이미지 들과 내용들이 입력되기 시작했죠.
가능한 처음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글을 읽는 방법도 천천히 대화를 나누듯 시작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증명하듯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었습니다. 증명되지 않은 것은 '의심'하거나 '이해'의 범주에 속하지 못했죠.
아주 가벼운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 발가락부터 움직이며, 발을 풀고, 일어서는 것부터. 그게 익숙해지면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는 식이었습니다.
다시 강조드리지만, 한 가지 일을 온전히 집중하며 정성스럽게 한다. 그게 모든 일의 출발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자기 탐구에서 강조하는 사도사이비라는 것의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단체에서 감히 할 수 없는 말을 이곳을 통해서 하고자 합니다.
12.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린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저를 돌아보고 생각을 알아차리려고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 스스로를 탐구하는 것이 자기 탐구입니다. 이는 이미 부처가 2500년 전에 설법했던 것이죠. 그 형식과 방법을 변형하고, 네빌고다드의 사상과 시크릿 류의 여러 가지 일들을 혼합해 둔 것이 '멘털 리셋'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것은 읽을 때부터 느꼈던 것이었죠. 그리고 어느 날 그분께서는 책 속에서 나와있는 자기 탐구의 여러 방법들을 유튜브에서는 사도사이비라며 경계하였습니다. 심지어 본인이 만든 자기 탐구라는 개념조차 관념적으로 하면 사도사이비라고 했었죠.
결코 틀린 말이 아니죠. 생각으로 머물러 있어서는 변화될 것들은 없습니다. 생각은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자동차 키를 돌리는 행위일 뿐입니다. 시동을 걸었으면 이동을 해야 하는 것이죠. 결국은 스스로 체험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상호 모순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리고 카페에서 올라오는 글들은 그저 기계적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붓다의 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붓다는 제자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그들에게 맞은 언어와 이야리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접근했다고 합니다.
또한 힌두교도들의 여러 수행법들, 현대에는 요가로 알려진 여러 가지 들에는 많은 지혜들이 담겨있었습니다. 이 몸이 너무나 나라를 것을 알고 있는데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라는 것, 생각을 지우라는 것... 이 모든 마음공부에 있는 말들 속에 상호 충돌되는 논리들
이건 논리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스스로도 납득되지 않는 일을 마을에 걸림 없이 행하기는 어렵고 행하지 않으면 더더욱 체험하기 어렵기에 저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습니다.
최대한 말이라는 한정된 단어를 논리적인 모순 없이 쉽고 간단하게 풀어가는 것이 진리다. 자기 반복적인 수많은 책들과 마음공부들에서 벗어나 붓다는 과연 어떻게 인간을 벗어난 초월적인 경험을 하게 된 것일까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불경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반야심경은 이전부터 취미로 외웠었고, 처음으로 금강경과 천수경을 접했습니다. 더 많은 경전이 있었지만 이 두 가지 만으로도 너무나 방대한 양에 버거웠습니다.
그리고 힌두교의 베다경전중의 하나인 우파니샤드를 읽었습니다. 그렇게 온전히 읽기, 또다시 그것을 정리하면서 머릿속에서 전체적인 구성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인간 붓다라는 책을 통해 불교의 여러 법들이 생기게 된 '율장'을 읽게 되었습니다.
짧은 양이며 반복구문이 많은 것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 하나 이유 없는 것이 없었으며, 너무나 인간 본연의 자연스러운 반응들에 놀랐습니다.
더더구나 '아난다' 존자를 부르는 데 있어 학식은 있으나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말에 저 자신이 보였습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도저히 몸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존재.
그 와중에 예수의 가르침도 수많은 것이 있으나 결국은 '사랑'아라는 것, 부처 역시 그 많은 이야기들이 결국은 '집착을 버리는 것'으로 단순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즉 깨달음은 집착 없이 사랑하는 것이구나. 하지만 여전히 너와 나는 명확하게 구분되게 느껴졌습니다. 욕망을 지우면 욕망이 이루어진다? 욕망이 없는데 대체 무엇이 이루어진단 말인가?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자. 그 모든 말이 다 진리이다 한들, 나라는 사람에게 맞는 것을 찾은 것이 전부다.
13. 첫 번째 집착, 멘탈리셋을 버리다.
결국 제가 이 책 속에서 얻은 것은 '본성'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흔히 참자아라고 부르지요. 물론 상호의존성, 상호침투성, 끌어당김의 법칙을 강조하지만 그건 그냥 현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분열에 대한 합의, 전초오류등의 여러 철학적 개념을 말씀하지만 결국 여러 가지 붓다의 가르침에 기초한 기존의 이론을 용어만 바꾸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과학자들의 책을 보면 각기 논쟁은 다르지만 그 사고의 방식 유사합니다.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합니다. 결과가 다르면 수정하고 이를 반복하는 것이죠.
레스터 레븐슨이 '궁극의 열쇠'를 다시금 꺼내어 3,4번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어떤 개념이 있었습니다. 과연 생각은 어떻게 물질을 창조하게 하는 것인가? 그저 육체를 이용하는 것? 아니면 어떤 물리적인 형상과정
책을 몇 번이고 정리를 했습니다. 워낙 양이 방대하여 체계화되지 않았습니다. 동어 반복도 많았고요. 그렇게 rev1, rev2를 만들어 내었죠.
'본성'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부터 정말 많은 마음공부와 관련된 분들이 같은 개념으로 진리에 깨달아 간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즉 답은 눈앞에 있었으나 아는 만큼 보였던 것뿐이죠.
저는 조금씩 현실적인 부분에서도 나아지고 있었고, 어떤 성찰의 깊이도 넓어지고 깊어지는 체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카페에 글을 남겼지만 이제는 그 방법적 접근에 대해 부정당하였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이 일이 행해진다면 방법에 대한 것이 아닌 여러 약을 써야 하는 것이 맞다고 보는데, 한 가지를 고집한다?
오랜 관찰과, 또 그들의 이야기에 반응하는 내 마음속에서 작은 성찰이 하나 일었습니다. 굳이 그들의 길에 내가 참여할 이유도 없으며, 신경 쓸 일도 없다. 실제로 그쪽 운영진도 제가 그들의 영성 사업에 방해되는 듯 보였기에, 마지막 진심이 담긴 글을 적고 탈퇴하고, 유튜브 구독도 취소했습니다.
그들 역시 제가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감사하며 떠나는 글을 지워버렸습니다. 더 이상 무의미한 것에 집착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취할 것은 이미 취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통해 사실 이 모든 질문이 시작된 레스터의 깨달음에 더 깊은 궁금함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현대에서 그가 행한 여러 경험들은 믿기 힘든 것들이었죠.
그때 정말 한 인물이 떠올랐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저의 롤모델, 멘토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to be cou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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